<타인의 삶>이 보여주는 마지막 10분. 2

감각의 동조화를 이끌어내는 수많은 영화적 장치들이 있지만, 가장 효율적인 수단으로는 역시나 주연배우의 호연이 아닐까싶다.
<타인의 삶>에서는 주연 울리쉬 뮤흐의 호연이 유독 인상깊다. 단조로운 내러티브는 관객들에게 2시간에 가까운 인내를 요구하지만, 마지막 10분이 주는 감동만으로도 관객들은 그 인내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마지막 시퀀스 10분은 지금껏 본 영화들 중 최고의 10분이라고 꼽고 싶다.

한편으로 <타인의 삶>은 비양식화된 연기만으로도 원맨 무비가 가능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울리쉬 뮤흐라는 배우에 대해 관심이 생겨 찾아보았더니 2007년도에 작센 주의 자택에서 위암으로 사망하였다한다.<타인의 삶>은 그의 유작이다.

좋은 곳에 가셨기를.

그러고보면 이맘 때 보는 영화들 중엔 유독 좋은 영화가 많았다.


괴물 - 직설적 제목, 다의적 질문. 2

작가는 하나의 정치적 인물이라 설파한 피카소의 견해에 굳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모든 예술작품은 나름의 정치적 견해를 가진다. 어떠한 정치성도 배제한 순수예술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지만, 순수예술의 기치 아래 정치를 거부하는 것그 자체가 역설적으로는 하나의 정치적인 기술이라는 해석은 여전히 가능하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대량소비되는 대중예술이지만, 개개인이 받아들이는 텍스트는 다의적이다. 존 스튜어트 홀의 견해에 따르면, 관객은 감독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대면할 때 이를 수용하거나, ‘교섭하거나, 철저히 저항한다스크린과의 대화과정에서 관객들은 장면 장면마다 전체의 맥락을 추출해내는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영화의 궁극적인 메시지를 나름의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이같은 관점에서 바라볼 때 한 편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견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이데올로기 수용의 과정이다.(버디무비편 부분인용)

영화가 대중예술로서 관객과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한다는 점을 인식할 때, 생산, 피드백, 정형화의 과정에서 피드백이란 결국 흥행이다. 한 편의 흥행작은 수많은 관객들이 이에 동조하고 공감하였다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2006년의 봉준호 감독의 화제작 괴물을 살펴보는 것은 당시 한국사회 전반에 대해 속속들이 살펴볼 수 있는 하나의 좋은 계기가 되어줄 것이다.

괴물의 내러티브는 단순하다. 직설적인 제목에서 보듯, 한강에 괴물이 출몰하고, 한 소녀가 괴물에게 납치를 당하고, 그 소녀를 구하기 위해 가족원들이 괴물을 쫗는다. 특별할 것 하나 없고, 등장인물들 또한 일상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이 시대의 구성원들이다. 평범하다면 평범할 수 있는 이 영화에 1000만이 넘는 관객들이 그토록 열렬한 지지를 보내었던 이유는, 언뜻 단순해보이는 내러티브 뒤에서 끊임없이 관객들과 대화를 시도하며 다양한 문제의식에 대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봉준호 감독만이 구사할 수 있는 수려한 영화언어가 한 몫 했음은 물론이다.

대체적으로 SF물에서 헐리웃 블록버스터들이 따르는 방식(즉 외부의 생명체를 타자화하고 이에 대한 내부 구성원들의 극복과정을 그린)과는 다른 방식으로 봉준호 감독은 영화 속 괴물을 설정한다. 우리 사회 어딘가에 살고 있지만, 쉽사리 인지하지 못하는, 내부의 돌연변이라는 설정을 통해서 봉준호 감독은 실로 무서운 것은 우리가 쉽게 인지하지 못하는 고정된 사고라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들이 너무나 일상적으로 접하는 공간인 한강을 주무대로 설정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 과정에서 봉준호 감독은 평소 생각하던 일상의 문제의식들을 작품 속에 녹여낸다. 실제 있었던 미군의 포름 알데히드 불법방류 사건을 영화에 차용하고, 이후 존재하지 않는바이러스와 관련한 일련의 소동들을 보여주며 현대 한국 사회에서 미국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던가, 한편으로 이에 대항하는 시위꾼들을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여주면서는 알맹이 없이 껍데기로 전락해버린 문제의식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던가 하는 식이다.

영화 속의 국가기능의 부재에 분노하고 대항하는 인물들을 가족이라는 테두리로 묶어놓은 것도 인상적이다. 대체로 헐리웃의 영화들이 남자 주인공 한 명을 히어로로 설정하고, 옆에 보조적 역할을 하는 히로인을 두는 것이 일반적인 것을 감안할 때, 국가기능에 대항하는 최소한의 아나키적 단위로서의 가족은 의미있다. 그리고 이러한 설정은 현상금을 위해 힘든 시기를 함께 이겨냈던 후배까지도 팔아먹는 시대상황과 맞물려 더욱 더 강한 설득력을 갖게 된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이 있은 봉준호 감독이 우라사와 나오키의 팬이라는 사실을 알고 난 뒤부터는, 영화의 많은 부분이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에서 모티프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이다. 앞서 말했던 공포의 근원은 익숙한 내부에 있다던가, 국가기능의 부재에 대항하는 최소한의 아나키적 단위로 친구라는 일상적 연대를 내세웠다던가 하는 점은 괴물과 많은 유사점을 갖는다. 비교하면서 보는 것도 많은 재미가 있을 것이다.

전지구적 위기의 극복과정을 묘사하는 일반적 헐리웃 영화와는 달리 영화 괴물의 위기는 한 가족 내부의 문제에 국한된다. 국가는 가족적 연대와는 철저히 구분되고 오히려 이들을 억압하는 부조리한 존재로 묘사되는데, 최후의 무기가 화염병이라던가 쇠파이프라던가 하는 점은 괴물내부의 국가성과 관련해서 볼 때 재미있는 설정이다. 이러한 결에서 괴물은 단순히 괴물과 이에 맞서는 소시민들의 영웅담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괴물이라는 직설적인 제목은 사실 가장 다의적인 제목이 되는 것이며, 이 시대에 던지는 자극적인 질문이 되기도 한다.


26살 겨울. 1

햇빛이 잘드는 내 자리도 저 나름의 겨울을 함께 견디는 모양으로, 다시 찾을 땐 늘 한 구석이 차다. 
어쩔 수 없는 것은 모두에 있어 똑같다. 
매일 같이 누구를 만나던 일상도 이제 조금은 변해서, 일주일의 하루만이 그저 좋고, 그래서 가만히 그 날을 기다린다.

무선인터넷 신청은 귀찮아서 안하면서도, 또 데이터 요금은 부담스러워, 오래된 CD에서 추출한 조동익을 가만히 듣는다. 
괴로움이 곧 그리움이라 또 깨달음이라. 

후회가 없다면 그 또한 거짓말이겠지만, 부질없는 감정의 침윤 끝엔 늘 지나간 날들이야 무슨 소용이랴 싶다. 
당시엔 그 시절 나름의 고민과 즐거움들로 가득 차 있었을거라 믿는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지구를 지켜라>를 보면 주인공 병구가 이런 말을 한다. 
"고통이란 절대로 익숙해질 수 없는 법이거든". 
당시엔 인상깊었던 말이지만, 한편으로 범인의 일생에서 익숙해질만큼 긴 고통이란 또 얼마나 되겠는가. 

어제는 한강이 잘 보이는 친구네의 옥상에서, 여기서 맞는 여름밤은 끝내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추운 날씨였지만, 오르막이여서 오히려 따뜻했다. 
낡은 한옥이었지만, 첨단의 한켠에 자리해 더 질박해보였다. 
그러고보면, 아직도 여러모로 내겐 괜찮은 나날들이다.

좋으면 장땡이지. 2

한국과 헐리웃 블록버스터 전쟁 영화는 늘 퀄리티에 비해 패널들의 평점이 저조하다. 주로 하는 이야기들은 미패권주의, 소영웅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던가, 전쟁을 비판하는 듯 하지만 실제론 전쟁 속의 막대한 시각 이미지를 소비하는, 생산과 소비의 접점에서 모순이 발생하는 데 대한 지적이라던가.


영화의 티피컬을 비판하는 이들은 자신들의 주장이 뭔가 진일보한 시각에 서있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 실제론 이들의 비평 또한 놀라울 정도로 티피컬이다.(사회 전반에서 일부지식인들의 비평 행태가 이렇다.) 이또한 상호소통을 거부하는 지적오만의 자세이고, 결코 올바른 비평가의 자세는 아니라본다. 솔직하게 말해서, 어떤 관객들은 솔직하지 못하다.


마이 웨이나 올초 개봉한 고지전은 더할나위 없이 웰메이드라고 생각하고 영화관을 나왔는데, 집에 돌아와 본 전문비평가들의 평점은 작자의 노력에 비해 터무니 없이 초라하다. 그들의 전문가적 시론을 읽어봤을 때 수긍이 가지 않는 것은 아니며, 또 다양한 시각이 발전적인 방향으로 산업을 이끌어갈 것임도 분명하다. 하지만 "그 영화가 그 정도는 아니잖아. 다들 좋다했는데" 하는 사태가 빈번하게 발생한다는 현실은 안타깝다. 때때로 비평가 집단은 대다수 관객의 감동을 싸구려로 전락시키는 것을 즐기는 것 같다.


아무리 좋은 변화구가 있어도 호흡을 조정할 묵직한 직구가 없는 투수는 삼류다. 윤성현이 만들 수 있는 영화를 강제규나 윤제균이 똑같은 퀄리티로 만들 수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반대로 강제규처럼 티피컬한 블록버스터를 제작한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힘든 일이다.


Punch Drunk Love라는 영화를 좋아했던 것은, 메시지보다도 전체적인 미쟝센이 놀라울 정도로 사랑에 빠진 한 남자의 모습을 잘 묘사했다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순한 내러티브 속에서도 '자본주의에 대한 탈출의 과정' 따위의 해석이 가능하긴하다. 영화를 보는 데에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할 수 있음은 당연지사지만, 솔직히 이런 해석들이 개입하는 것이 오히려 감독의 의중을 흐려지게하고 이 영화만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미학 수업에 들어가서 좋아하는 영화에 '친구'를 쓰려다 차마 쓰지 못한 것은, 이런 비평가들의 시각이 못내 불편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내가 이런 볼멘 소리를 하는 것도 역시나 누군가의 입장에선 티피컬할 것이다. 이 모든 불만은 아직도 내가 단순하기 때문이다. 하긴 평론가들이 아니면 애당초 존재할 수 없는 영화가 오할은 되는 것이 현실이니.


날치기 통과를 지켜보며, 짧은 단상. 3

나는 경제학과 국제통상학을 전공하지 않았기에 단지 시론적 차원에서만 피상적으로 FTA문제를 접했을 따름이지 그 속속들이 내막은 잘 알지 못한다. FTA에 대한 견해란 것도 언론매체와, SNS, 그리고 정부의 독소조항 반박문 정도에서 근거한 것이고, 따라서 나의 견해란 일견 장님 코끼리 만지기 꼴일 것이며 제대로 살펴 볼 수 있다한들 그 또한 본질적 외눈박이에 다름 아니다.

하지만 경제학을 잘 모르는 내 시각에서도 알 수 있는 것은, 미국의 신자유주의가 시장을 호령하던 참여정부 시절에 체결된 FTA를 가지고 여당이 ISD 조항은 토씨하나 고치지 않았다며 설거지론을 주장하는 것은 정작 그 체결주체인 현 야당보다 한층 더 무책임하다는 것이다.

FTA 없이도 미국시장에서 대기업들은 승승장구하는 반면, 정작 미국과 유럽은 신자유주의 체제 하에서 삐걱거리고 있다. 물론 하루 아침에 세계경제 질서가 바뀔리야 만무하지만, 적어도 99:1의 양극화 시대에 언제까지 특정 계층의 희생을 기반으로 성장을 추구할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 성찰은 필요했다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당은 설거지론 주장에 앞서서 기본 기조는 유지하되, 지난 4년간 변화된 현실을 협상에 반영했어야 옳다.

분명 기대되는 이익은 모호하고 피해는 뚜렷하다. 누군가에게는 대양이 열리지만 누군가는 정글로 들어선다. 현 상황에서 한미 FTA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이는 분명 지적으로 편향되있는 사람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타협의 기술로써 정치란 것을 두고 있다. FTA 그 자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러한 정치가 개판라는 것이다.

가장 안타까운 점은 FTA에 대한 논쟁이 단지 매국, 애국의 프레임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친구는 이러한 애국 매국 슬로건이 잘먹혀들어가는 상황이 우리나라 정치의 저능한 현주소라고 지적하면서, 앞으로 향후 논쟁에서는 야권이 국가 대 국가가 아닌 자본가와 노동자의 문제로 아젠다를 치환하는 지혜를 보여줬으면 좋겠다하였다. FTA에 대한 토론에서는 애국 매국의 단순한 이분법적 잣대를 뛰어넘어 '언제까지 약자의 희생 위에서 번영을 논할 것인가', '그로 인해 얻은 이익의 사회적 차원의 재분배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 아닌가싶다. 

매국, 애국. 
기술은 첨단을 달리는데 사상은 아직도 답보하는 것 같아 안쓰럽다.
  

1 2 3 4 5 6 7 8 9